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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교회초기애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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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양실 (2003-07-03 11:06:55, Hit : 3081, Vote : 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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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기애환사(1973년 11월)

◇1973년 11월◇
감사절을 기념하여 김동희 장로님이 교회 내벽과 교회당 정면 외벽에
페인트칠과 천장 베니어판에 락카칠을 해놓으셨다. 5만원 가량 든 것이
다. 처음 집안의 아늑감을 지녀 보았다. 창공의 감이 이제는 사라졌다. 5,
6만원이란 교회가 선 이래 처음 보는 거액이다. 어느 정도 교회가 자랐는
가 보다. 이와 아울러 김승언 집사님이 1만여 원을 들여 교회 천장에 샨
데리아를 가설했다. 전력이 약하여 어두컴컴한 등에 예배 드리던 것이 이
로 밝아졌다. 모든 기쁜 얼굴들이었다.
제직회에서도 힘을 내어 의자 새로 해놓기로 하고 2인에 한 개씩 이상씩
하기로 하고 교회 경상비와 합하여 20개를 해 놓았다. 전날의 의자는 널
빤지 의자로 얼마나 불편하고 거칠어서 공화당 같았는데. 20개의 의자를
들여 놓고나니 이제야 교회당다운 감이 났다.

교회 사택에 전세금을 빼기 위해서 김동희 장로님의 제의로 두 번째로
계를 만들었다. 계를 든 분은 김동희 박복실 주선태 김장기 이제인 임상
준 강용렬 신선옥 김정현 민병희 이었다. 그리하여 사택 뒷방에 세 든 분
을 내보내고 담임 목사 가정이 이사왔다. 외인출입이 번거럽던 일이 이제
야 교회당 뜰 안 같았고 점차 교회 일이 궤도상에 오르는 것같았다. 이제
앞방의 10만원의 전세만 빼면 빚은 없고 사택은 제직회실과 교역자 방으
로 온전케 된다.

첫 성경통신과 졸업식 거행했다.
졸업자 명단은 이순렬 윤순자 권옥례 가남현 한윤수 이경란 김희자 7인
이었다.

◇「소리」지(誌)에 대한 이야기◇
내가 기독공보사 편집국장을 그만둔 후, 박 전도사님은 나의 문서전도의
뜻을 살리려 박찬일 선생님댁을 방문, 그 부인 한종학 집사님께 이 뜻을
말했다. 마침 박찬일 선생님이 그 간의 직장에서 11조 몫으로 저축해 두
었던 100만원이 있어서 그 금액을 문서전도비롷 내놓기로 작정, 이를 의
회사에 빚으로 주어 월 3만원씩의 이자를 받기로 했다.
이 3만원으로 월간 전도지「소리」지(誌)를 출간했다. 발행이 진행됨에
따라 전국교회의지지 환영을 받게되어 정식 문공부에 등록을 내고 정기
적으로 간행케 되었다.
발행인 박 전도사
편집인 김관호 였다.

박찬일 선생님이 편집자의 수고비조로 월 5천 원씩 박 전도사에게 책정,
이 돈을 모아 모갯돈으로 내게 주기로 하고 계도 들고 변리로 모아 두기
로 하였다. 전기 간행물 등록에는 50면(面)을 최소 한도로 내야만 한다고
해서 월 3만 원으로는 부족함으로 회원제로 하기로 하고 성금을 보낼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한 편으로는 후원회도 조직하기로 했는데, 이원
태 목사님의 노고로 다음과 같이 조직이 되었다.
후원회장:김성수 목사,
회원:최종해 임택진 오병수 박치순 이동섭 최원행 안관호 김장기

처음에는 신임하던 실업가들을 손수 찾았는데 겨우 2만원, 5만원이 최고
이고 외상이어서 실망하고 손을 떼고 말았다. 홍익교회의 많은 기도와 교
인들의 수천 원씩의 찬조금이 있었으나 이것으로도 충당이 못 되었다. 그
러는 동안 백만 원의 기금이 안양의 앙계장 시설비로 들어가고 계란 팔
아 발행비 마련키로 한 집사님이 작정하고 시작했으나 실패로 돌아갔고,
한 집사님이 따로 월 4만 원씩 얻어서 보내와 이것으로 발행, 실비는 되
었다. 하지만, 편집잡비 월 1만 원은 부족하고 더욱이 집필자들에게 계속
무료로 봉사요청하기도 점점 어려워지는 형편이었다.

이러는 중에 박 전도사님의 와병(臥病), 끝내 세상을 떠나시고, 정기덕
목사님이 무진 노력으로 수개월 발행하면서 근근 유지는 할 수 있었으나
편집자인 내가 박성자 자매의 파문에 휘말리어 발행한 기력을 전연 상실
해 버렸다. 주변 여러분들이 자신 있게 전망하고 나섰으나 현실은 달라,
기진맥진 상태였다. 또한 한 집사님이 혼자서 힘겨움에 잠기시고 나도 의
욕을 잃고나니 「소리」지(誌)는 4년만에 끝을 맺고 말았다. 발행실비는
되었으나 편집인 정신이 죽어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소리」지(誌)는 내
손에 죽은 것이다.
아픈 가슴, 죄인된 나.
합본 3권, 4권 등, 2년치를 정기적 목사님이 자기 돈으로 제본하였다. 거
의 다 기증본으로 나갔다. 정 목사님에게 이 비용을 물어야겠는데 빚진
채로 남아 있다.

1974년 2월 13일 소리사의 일절, 전국 독자에게로 온 수천 통의 신앙통
신들, 명부록, 등록표 등 다 내 손에 연소해 버렸다. 내가 돌연 입원, 의사
의 최후 선고 등, 나는 나의 생의 절망을 통감, 나 없을 때 풍지백산될 일
절을 거두어 하루 아궁이 앞에 앉아 다 불에 태운 것이다. 소리지 장부는
한종배 장로에게 가 있고, 대체 저금통장는 박 전도사님 도장이 없어서
무효가 되고(2, 3천 원 잔고 못 찾은 채), 우체국 사서함도 그대로 페기,
독자의 돈은 반환했다. 빈손으로 시작했던 일, 빈 손 털고 일어난 셈, 그
간의 나의 편집비 조 20만 원은 박 전도사님 장례비로 다 들어갔으니 빈
손 들고일어난 셈이다.
                                             (1974년 4월 13일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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