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로그인 | 회원가입 | 사이트맵 |  
무제 문서
 
인사말
교회역사
교역자소개
장로소개
조직도
교회약도
홍익교회초기애환사
0
 29   2   1

  View Articles

Name  
   김관호 목사 (2003-06-02 19:37:28, Hit : 2518, Vote : 333)
Subject  
   초기애환사(1972년 11월)
◇1972년 11월 21일◇
김동희 피택장로 강용렬 박복실 두 분의 권사 취임예배를 드리다. 김동희
장로님은 피택장로의 이름을 오늘부터 호칭키로 하였다. 위의 세분은 취
임기념으로 교회의 벽시계를 해놓으셨다. 교회는 세 분에게 성경전서 한
권씩을 기념선물로 드렸다.

김동희 장로님은 노회에서 시험을 보았다. 다른 과목은 다 급제하였으나  
성경과목이 약간 점수가 모자람으로 고시위원에서는 장로 허락의견 있었
으나 성경과목을 담당한 한승직 목사가 1년만 보류코 내회에 그저 허락
하자는 의견이어서 고시위원장 용재호 목사도, 나도 이제 양보하여 6개월
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하지만 본인이 장로되길 불원하여 다음 노회에
가지 않으심으로 부득이 교회의 형편이 의하여 피택장로로 시무케 하였
다. 물론 법적 장로는 못되나 교회 내 전원의 열망으로 교회 내에서의 장
로님으로 인정한 것이다. 사도시대교회처럼 말이다.

◇1972년 12월 10일◇
부산서 박성자 자매가 왔다. 「소리」지에서 성자를 알고 김장기 장로가
부산 가셨을 때 그의 가정을 방문하고 그녀의 불구(不具)를 깊이 동정, 무
슨 치료의 길이 없을까 모색 중, 내 아내가 정 집사의 말을 듣고 대방동
서 그런 아들을 고치는 외국인 기관이 있다는 말을 듣고 길을 열어보기
로 하였다. 그러는 중, 어느 날 나는 서대문 노상서 정 여전도사를 만나
그 애길을 했더니 세브란스에 그런 병 고치는 길이 있다고 하여 그가 원
장과 교섭하였다. 원장은 자기 재임시 그 아이를 고치겠다면서 무료입원
길을 마련한다고 해서 나는 부산에 두 번 세 번 전보로 상경하기를 통보
했다. 이와 동시 김장기 장로님은 자기가 성자의 있을 방을 마련한다고
하여 안심하고 전보를 쳤던 것이다.

마침내 그녀가 언니와 같이 상경하였다. 일단 여관에 투숙케 하고 세브
란스 병원을 찾았다. 정전도사를 만나 같이 치료실에 갔다. 원장의 장담
은 거짓말이었다. 치료할 의가 우선 진찰, 고칠 수 없다고 했다. 무책임한
전도사의 무책임한 말을 듣고 이 낭패를 만났다. 또한 전도사는 병원 측,
혹은 원장에  속았을 것이다. 당장 부산으로 내려가라고 할 수도 없었다.
또한 김 장로님의 약속도 뜻대로 안되어 할 수 없이 교회 사택, 이정남
전도사님이 있는 윗방에 임시로 있게 하였다.

반피득 목사가 이런 아이를 고친다는 얘기를 이원태 목사에게 듣고 이
목사의 주선으로 반 선교사를 방문하였다. 나는 또 한종학 집사께 이 상
정을 얘기하니 장기로 치료할 길을 찾자고 하여 그러기 위해서는 성자의
언니의 직장부터 마련해 주자고 하여 그의 주선으로 홀트양자회 직원으
로 채용됐다고 하였다. 직장 나가기 위하여 얼마나 기간을 두어 타이프와
어학공부가 좋겠다 하여 교회당 뒷방이 있는 채로 수개월 체류하는 사이
그녀들의 생활비를 내 아내가 3만원을 냈고 내가 내 용돈서 지불해 주었
다.

이 사이 아랫방의 이정남 전도사 부인 김영애 선생과 성자 언니와의 싸
움이 생겼다. 머리채 잡는 정도까지 일이 벌어졌다. 이 일로 인해서인가
이 전도사님은 사표내고 나가시고 교회는 걱정거리에 아팠다. 한 집사님
이 약속했던 양자회도 어찌된 셈인지 거절 당했다. 교회에서는 성자의 있
는 것을 좋지 않게 생각하고 김장로님, 한 집사님, 나중에는 나의 아내까
지 다 마음이 떠나 버리므로 여기에서 목사의 입장은 곤경에 빠졌다.

성자 언니를 내려보낼 수도 없는 데다가 그녀는 직장 속은 분노를 폭발
하여 여기 저기 좌충우돌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나는 딴 길을 모색하고
자 대학봉사회. 김봉삼 목사께 사정 얘기하고 직장 얻기를 요청했다. 그
러자 그 목사는 자기 기관에 목공부를 신설하려던 차에 잘 되었다고 하
여서 거기 기대 걸고 또 한 두 달 기다렸다. 후일 그도 뜻대로 안 된다고
답이 옴으로 이래저래 1년을 허송세월하고 생활비는 계속 들고 박양은
자신을 억제하기 못하므로 곤란을 나만 당하였다.

이 사이 마귀가 장난함으로 그 파문이 우리 가정에도 미쳤고 「소리」
지에도 미쳤고 나는 이래저래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다. 나는 졸도하여 입
원함으로 돈 10만원이 자부의 빚으로 달아났을 정도였다. 교회에 치료비
신세 안 진 것을 다행이었으나 가난한 교회의 목사란 우선 건강해야 한
다고 새삼 느꼈다. 박양도 내친걸음으로 막 나갔고 아내와는 별거하기도
하고, 「소리」지는 폐간되었다. 아아, 1973년은 악몽 같은 한 해였다.

  1974년 새해 박성자 자매는 부산으로 내려갔고 그 후에 내게 감사하다
는 박양의 편지를 받는 등,  1975년부터는 아픈 상처도 점차 가시었다. 한
가지 결론은 무책임한 말의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결국 손떼지 못하는
입장에서는 나만 진 것이다. 실력 없는 동정은 금물인 것을, 신앙에서 아
닌 일절 주선은 다 목사의 할 일이 아님을, 내가 못할 일은 결코 개입하
지 말 것을 너무 늦게나마 느끼고 또 느꼈다.  





no
subject
name
date
hit
*
29
  5. 45주년사 원고(1993-2005년)

목양실
2005/09/01 4045 340
28
  4. 45주년사 원고(1983년-1992년)

목양실
2005/09/01 3103 330
27
  3. 45주년사 원고(1976년-1982년)

목양실
2005/09/01 2786 327
26
  2. 45주년사 원고(1968년-1975년)

목양실
2005/09/01 3134 362
25
  1. 45주년사 원고(1960-1967년)

목양실
2005/09/01 3126 334
24
  초기애환사(1982년)

김태복 목사
2004/05/07 3035 415
23
  초기애환사(건축준비기)

김태복 목사
2004/05/07 2611 468
22
  초기애환사(1977년)

김태복 목사
2004/05/07 2718 482
21
  초기애환사 수록작업을 마치면서

김태복 목사
2003/07/23 3444 508
20
  초기애환사(마지막회)

김관호 목사
2003/07/23 3250 539
19
  초기애환사(1975년 여름)

김관호 목사
2003/07/22 3532 480
18
  초기애환사(1975년 첫주일)

김관호 목사
2003/07/21 3226 479
17
  초기애환사(1974년 11월)

김관호 목사
2003/07/14 3045 452
16
  초기애환사(십일조 교인 증가)

김관호 목사
2003/07/07 2628 437
15
  초기애환사(1973년 11월)

목양실
2003/07/03 3081 445

  초기애환사(1972년 11월)

김관호 목사
2003/06/02 2518 333
13
  초기애환사(1972년 5월)

김관호 목사
2003/04/28 2690 327
12
  초기애환사(1971년 여름)

김관호 목사
2003/04/28 2540 429
11
  초기애환사(1968년 여름)

김관호 목사
2003/04/16 2342 329
10
  최기애환사(1968년 4월)

김관호 목사
2003/04/14 2442 336
1 [2]

Copyright 1999-2017 Zeroboard / skin by Zetyx

 
청년부 | 고등부
중등부 | 소년부
유년부 | 유치부
영아부 | 아기학교
호산나찬양대
할렐루야찬양대
남선교회연합카페
고양홍익교회
복된홍익교회
아세아홍익교회

 
교회소개 / 예 배 / 공동체 / 교회학교 / 홍익소식 / 전도와선교 / 홍익마당
Copyright 2001.Hongic Community Church. All Rights Reserved.
우편번호 133-811 서울특별시 성동구 마장동 381-9
대표전화 2297-2040~1 Fax 2297-20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