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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양실 (2005-09-01 16:44:20, Hit : 2786, Vote : 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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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45주년사 원고(1976년-1982년)
3. 1차부흥기(1972년-1982년)

1975년 10월 15년 동안 시무하시던 김관호 목사가 65세 나이로 은퇴하고 후임자로 경기도 마석부근 가곡에서 목회하던 35세의 김태복 목사가 부임하게 되었다. 부임 당시 교세는 너무나 약한 상태여서 사울시 안에 서울노회 42 교회들 가운데 끝에서 3번째로 작은 교회였다(밑의 도표를 참조)

  ◇105회 서울노회(1975년) 당시 각 교회 세례교인수◇  
동부시찰
광장189 구의158 동부중앙37 동서울120 마장중앙68 상원137 성수동102
성중30 송정150 왕십리중앙185 자양191 중곡동150 홍익44 화양중앙55  

성동시찰
금성122 금호302 금호중앙280 무학704 문화474 숭덕63 신당중앙330
신암125 약수493

종로시찰
동숭379 명륜중앙180 묘동210 새문안1213 수송105 승동146 안동301
연동678 원일230

중부시찰
남대문530 신광315 영락6111 을지로223 충무266 필동63 한성97 한양271

김태복 목사는 부임하자, 정상적인 교회 만들기에 힘쓰기 시작했다. 그 동안 새벽에 몇 분이 자유롭게 기도해 왔는데 새벽예배를 본격적으로 드리고 1977년 1월부터 금요기도회, 2월부터는 구역예배(6구역)도 시작했다. 또한 1977년 3월부터는 청년회를 중심으로 수요성경공부도 시작했다. 또한 그 동안 여전도회만 조직되어 있었는데 1976년 12월에 남선교회가 창립되었다(회장: 이수형집사).  

이처럼 교회가 정상적인 모습으로 운영되고 열심히 기도하기 시작하면서 1977년도부터 본격적 성장의 불길이 일기 시작함으로 교세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1977년 6월부터는, 그 동안 함께 대예배를 드리던 중고등부생들을 위해 1부 예배를 시작하게 되었다. 증가하는 교세를 보면, 1977년에 평균 장년 집회수가 127명에서 1978년 140명, 1979년에 170명, 1980년에 250명으로 증가함으로 30평짜리 구교회당만으로 예배와 교육을 하기에는 너무나 힘에 벅차게 되었다. 30평 교회당은 보조의자를 통로에 가득 설치해 놓고 최대한 수용할 수 있는 숫자가 180명이 한계선이었다.
주일마다 교회는 여기저기에서 들리는 즐거운 비명과 안내자들이 진땀 흘리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교회는 이렇게 성장하는 몸집에 맞추기 위해서 낡은 옷을 수선하기에 바빴다. 박순화 전도사가 바친 사택은 목사관(2방)과 교육관(2방, 마루)으로 유용하게 쓰고 있었는데 일부를 쓰고 있던 목사관은 뒤편에 있는 작은 집으로 옮기고 모든 방들을 교육관으로 쓰게 되었다.
특히 교회학교를 위해서 가장 수고한 이는 김인택 전도사였다. 그는 아동부와 중고등부를 위해 전심전력함으로 오늘의 교회학교를 이룩하는 데 큰 기초를 이룬 분이었다. 좁은 공간을 최대한 이용해서 교회학교를 운영하고 분반공부 장소가 없어서 교회 주변의 가정들을 설득하여 사용하기도 했다. 그 결과, 1981년도 10월 주보에 의하면 유치부 36명, 유초등부 177명, 중고등부 130명이 출석할 정도로 성장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교육관을 확충했음에도 증가하는 교인들과 교회학교 학생들을 수용할 길이 없어서 1980년도 교회당 안에 2충을 다락방식으로 10평 정도를 만들어 약70-80명을 더 앉게 만들었다. 그 공사를 위해 교회당 안에는 7개의 굵은 철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마루를 까는 특이한 공법을 고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교세가 250명 이상이 모이기 시작하자 그나마 늦게 오는 분들은 서서 예배를 드리거나 교육관 유아실에서 예배를 드리는 불편을 겪게 되었다.
마침내 임시방편으로 교회당과 교육관 사이에 벽을 헐고 그 중간을 친막으로 지붕을 만들어서 그 공간에 보조의자를 설치함으로 300명 이상 수용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교회당은 정말 가관의  모습이 되었다. 강대상에서 보면 교회당 1층과 2충, 복도와 교육관에 앉아 있는, 가지각색의 교인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할 정도로 무슨 잔치집의 모습과 흡사했다.
교회는 1981년 8월31일 총동원 주일예배에 303명이 모일정도로 성장됨으로 이제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성장에 따라 교회는 건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1978년부터 건축준비위원회(위원장:김동희 장로)가 구성하게 되었고 여전도회가 10만원 건축헌금을 내기 시작함으로 건축에 대한 불씨를 당기었다. 1979년부터는 매월 건축헌신예배를 드리기 시작하고 설계도를 교회당 안에 붙이어 온 교우들에게 희망을 넣어 주기도 했다. 1981년 7월에는 건축을 준비하기 위해서 사택을 부근으로 세내어 이사 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82년도 봄 건축을 위한 모든 포진을 이루었다.
마침내 1982년도 들어서서 교회 건축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크게 일기 시작했다. 1979년도부터 건축헌금을 시작했는데 1981년말 까지 50,375,230원이 적금되어 있었다. 건축위원회 계획은 건축비로 약 7천 5백만 원을 잡고 있었다. 약 2천여 만 정도가 부족한 셈이었다. 드디어 1982년 2월 17일 구청으로부터 건축허가가 나왔다. 교회는 그때부터 매일 밤 9시에 모여 기도회를 가지기 시작했다.
건축은 김화섭 집사가 운영하는 회사가 담당하고 마침내 3월 말경에 구교회당을 헐고 포크레인으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그리고 8월 15일에 교회당에 입당했다. 4개월 만에 해치운 놀라운 공사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기적의 역사였음을 너나없이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로는 이 지역은 건축허가를 전혀 나오지 않는 지역이고, 건축대지(110평)가 너무 작은데다가 어려운 교우들에게서 헌금을 엄청나게 요구해야 되는 것도 무리이며, 올라오는 언덕길이 너무 협소하여 자재운반이 곤란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80년도부터 정권이 바뀌면서 이 지역에도 건축허가가 나오기 시작했고 건축하기 전 사택도, 김 목사의 부친이 사택을 얻을 수 있는 자금을 몇 백만 원을 보내주었기 때문에 무리 없이 구하여 이사할 수 있었다.
임시예배처소도 어느 건물 이층을 세낼 예정이었으나 김승환 집사(현재 장로님)의 주선으로 한양대 땅을 빌리어 75평의 천막교회를 설치하여 매일 밤 9시기도회까지 드릴 수 있게 된 것도 다 하나님의 큰 도우심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건축하는 동안 주변 집들의 갖은 진정, 갖은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공사는 예정대로 진행되었고 공사기간에 장마철임에도 이상하게 그해에는 비가 크게 오지 않았고 건축하는 동안 10여 번의 사고위험이 있었을 지라도 극적으로 피하게 하셨다.
또한 재정적으로 하나님은 크게 도우셨다는 것도 특기할 일이다. 천만 원 이상 내신 특정한 분 없이 그저 교우들의 한 푼 두 푼의 모인 헌금, 즉 땀과 눈물이 모여 건축된 교회이기에 더욱 귀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또 하나의 사렙다 과부의 역사가 이룬 건축이었다. 교회 총 건축비와 의자, 기타 성구, 경비 일절 포함해서 약 1억 2천만 원의 비용이 지출되었는데, 이를 계산하면 1982년도에 약 6천만 원 이상이 헌금, 헌물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헌금하고도 일반경상헌금 38,605,355원이 수입되었으니 합하면 300여명의 가난한 교우들이 약 1억 원을 전심으로 헌금한 셈인 것이다. 그렇다고 교회는 헌금을 강요하지 않았고, 또한 건축을 위한 부흥회를 몇 년 동안 한번도 안 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이 교회당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기적으로 이루었다고 고백할 수가 있다.
그러면서도 건물이 골조며, 내장이며, 구조면에서도 얼마나 견고하고, 아름다운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춥지 않은 건물이며 본당 60여 평의 바닥면적과 중삼층을 합하여 약 500여명이 앉을 수 있는 교회가 되고 음향 면에도 뛰어난 것은 너무 감사한 일이다. 이 모든 하나님의 기적 이면에는 매일 밤, 비가 오나 바람 부나 6개월 동안 불철주야 기도한 성도들의 땀과 눈물의 수고가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특히 건축위원장이신 김동희 장로를 비롯하여 여러 중직들의 일치된 마음과 협력은 너무 고마운 일이었다.

김태복 목사는 홍익교회 청년회에서 발간하는 「창조」지 제10호(83년 11월)에 실린 ‘나의 30대’라는 제하(題下)의 글에서 그 시기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이제 30대 후반의 젊음을 바치어서 일할, 새로 부임한 교회는 가난한 언덕으로 스산함이 배어 있는 곳이었다. 이 지역은 내가 떠나왔던 시골 마을의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었고 분뇨냄새와 쓰레기 악취로 넘치고 있었으며, 언덕 밑으로는 청계천의 혼탁이 신음처럼 흐르고 있었다.
교회당은 낡았으며 교인 수는 시골교회와 엇비슷했다. 그리고 교인들의 영적 수준은 미숙 그대로였다. 그러나 거기에는 많은 청소년이 있었고 교인들의 가슴에는 순수함이 샘처럼 고여 있었다. 나는 전력을 다해 이 청소년들을 양육하며 저 교인들의 가슴의 샘을 퍼내고 퍼  내어 영적인 젖이 넘치게 함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교회, 많은 인재를 배출하는 교회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아내도 4년 동안 근무하던 중학교 교사도 사직하고 나와 함께 모든 시간을 바치며 교회 일에 전념했다. 우리 부부에게는 새벽도 밤도 없었다. 때로는 교회당에서 철야하며 금요일이면 서울 부근의 모든 산들을 오르며 기도하면서 영력을 길렀다. 이에 따라 교인들도 기도 운동, 성령운동을 호응하기 시작했다. 세상 적으로는 가난했으나 믿음으로는 부요하기 시작하는 교우들로 교회는 채워지기 시작했다.
더욱이나 77년도부터는 하나님의 기적이 강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교우들은 많은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고 간증했고, 온갖 난치병들이 치유되고, 믿지 않던 남편들이 교회에 출석하며 변화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부부는 눈물을 흘리며 우리같이 부족하기 짝이 없는 자들을 들어 쓰시는 하나님께 감사했다. 사실, 홍익교회는 부흥되기에는 너무나 불리한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서울 도처에 아파트와 연립주택이 건립되고, 발전으로 향하는 대로가 뚫리고 있는데 비해 이 빈촌은 많은 판자 집들이 강제 철거되어 떠나고 있었다. 언덕을 오르는 유일한 통로는 택시조차 오르기를 거부할 정도로 협착하기 그지없기에 원거리에 오는 우리 교우들은 버스 정류장에서부터 10여분 이상 걸어야 하는 불편을 겪어야 했다. 이렇게 불리한 지역임에도 하나님의 기적은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듯이 부흥의 역사를 부어주시고 계시는 것을 우리는 똑똑히 목도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교인들이 불어나 교회당 안에 다락을 달아 매고 그것도 모자라 한쪽 벽을 헐고 교육관과 천막으로 연결해서 자리를 마련하며 교인들은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에 고생을 하면서도 신나했다. 마침내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어서 가난한 교우들은 기도와 땀과 눈물로 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아담한 교회당을 건립했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헌당식을 가지게 되었다. 큰 기적의 건물이었다. 대부분 셋방에 사는 교인들이 희생적으로 낸 헌금과 매일 밤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의 선물이었다.”      

  1976부터 1982년까지의 중요행사는 다음과 같다.
1976년 1월  김관호 목사의 도서기증으로 기념도서실 개설
1977년 1월  김인택 교육전도사 사임, 장창만, 이애자 교육 전도사 부임
1977년 9월  김태복 목사 위임식
1978년 3월  김동희 장로 장립식
1978년 1월  장찬만 교육전도사 사임, 남상철 교육전도사 부임
1978년 10월 김정순 전도사 부임, 신용협동조합 개설
1979년 5월  남상철 교육전도사 사임, 서정오 교육전도사 부임
1979년 10월 노극순 장로, 박춘심 권사 취임식
1979년 10월 김관호 목사 미국 이민
1980년 1월  여전도회 1부, 2부(에스더회)로 분립
1980년 6월  서정오 교육전도사 사임, 김인택 교육전도사 부임
1981년 2월  홍익유치원 시작, 환자기도회 시작, 30구역으로 성장
1981년 5월  김정순 전도사 사임, 안삼식 전도사 부임(전임)
1982년 9월  헌당예배 및 임직식 거행
             장로장립(이수형 윤종삼) 안수집사(주선태 안호천 정달영)
             권사취임(장진분 신선옥) 권사은퇴(박복실)
1982년 10월 저녁예배 시간 오후 3시로 변경, 식당운영 시작
1982년 11월 교회 ‘운영규칙’ 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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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5. 45주년사 원고(1993-2005년)

목양실
2005/09/01 4045 340
28
  4. 45주년사 원고(1983년-1992년)

목양실
2005/09/01 3104 330

  3. 45주년사 원고(1976년-1982년)

목양실
2005/09/01 2786 327
26
  2. 45주년사 원고(1968년-1975년)

목양실
2005/09/01 3135 362
25
  1. 45주년사 원고(1960-1967년)

목양실
2005/09/01 3126 334
24
  초기애환사(1982년)

김태복 목사
2004/05/07 3036 415
23
  초기애환사(건축준비기)

김태복 목사
2004/05/07 2611 468
22
  초기애환사(1977년)

김태복 목사
2004/05/07 2719 482
21
  초기애환사 수록작업을 마치면서

김태복 목사
2003/07/23 3444 508
20
  초기애환사(마지막회)

김관호 목사
2003/07/23 3251 539
19
  초기애환사(1975년 여름)

김관호 목사
2003/07/22 3533 480
18
  초기애환사(1975년 첫주일)

김관호 목사
2003/07/21 3227 479
17
  초기애환사(1974년 11월)

김관호 목사
2003/07/14 3046 452
16
  초기애환사(십일조 교인 증가)

김관호 목사
2003/07/07 2629 437
15
  초기애환사(1973년 11월)

목양실
2003/07/03 3082 445
14
  초기애환사(1972년 11월)

김관호 목사
2003/06/02 2519 333
13
  초기애환사(1972년 5월)

김관호 목사
2003/04/28 2690 327
12
  초기애환사(1971년 여름)

김관호 목사
2003/04/28 2540 429
11
  초기애환사(1968년 여름)

김관호 목사
2003/04/16 2342 329
10
  최기애환사(1968년 4월)

김관호 목사
2003/04/14 2442 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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