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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교회초기애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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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양실 (2005-09-01 16:40:29, Hit : 3171, Vote : 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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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45주년사 원고(1968년-1975년)
2. 교회 기초확립기(1968년-1975년)
홍익동에서 마장동381-9번지로 이전하고 신축한 후에 교회는 새롭게 개척하는 입장이 되었다. 홍익동에서는 한 때 장년 200명 이상이 출석할 정도로 성장했지만, 그런 성장은 김관호 목사를 추종하는 분들을 중심하여 많은 장로들이 모이게 되었고, 특히 이종정 장로가 총무로 재직하는 세계기독교사회봉사회(C.W.S.)가 구제사업의 일환으로 헌양말 실 푸는 공장을 마련함으로 많은 여직공들이 교회에 출석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교회 이전과 이종정 장로로 인한 많은 시험이 일어나면서 다른 교회에서 온 장로들이 다 떠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새롭게 출발하는 교회에는 장년이 약60명이 출석하게 되었다.

   (1)신축교회당에서 첫 제직회
   새 교회당에서 첫 제직회가 열렸다.
   제직회 명단은 다음과 같다.
    회장(김관호)  서기(이수형)  회계(김동희)
    장로(김장기)  전도사(박순화)  권사(박문실)
    남집사(김동희 송준섭 이수형 임상준 이대환 정인생 문공인)
    여집사(염종귀 강용렬 신선옥 김선희 장진분 정신애 박금구 이정희 조영희)
    주일학교 유년부장(이대환)  
    교사(문공신 이수형 최병권 이대현 한윤수 남명옥 임영순 정현옥 김영희 이정자
          이진자 이원현 정인생 장용구 심정근 이복희 김정현 변영자 홍미화 정순분)
    성가대장(김동희) 지휘(정인생) 반주(김양자)
    여전도회 명단
    회장(강용렬) 서기(조영희) 회계(김선희)
    전도부장(김은선) 성미부장(염종귀) 봉사부장(신선옥)

  13)1968년 1월 1일(월), 신년예배와 친목회를 위해서 김장기 장로댁에서 모였다. 이날 참       석한 제직은 21명 이었다. 이날 음식은 김장기 장로 댁에서 냈다. 김선희 집사의 노고가 얼마나 컸는지 모른다. 저녁 늦게까지 윷놀이로 친목을 도모했다.

  (2)교회당 마루 바닥공사  
  1968년 3월, 제직회에서 김동희 집사가 교회당 바닥을 깔자는 제의를 하여 즉석에서 헌금하였다. 그 내역은 다음과 같다. 3월 26일부터 마루를 깔기 시작하여 3월 30일 끝마쳤다.

(3)김관호 목사 위임식  
1968년 3월 31일, 김관호 목사의 위임목사 투표를 실시하였다. 서울노회 성동시찰장 이의호 목사가 와서 공동의회를 주관하였다. 투표자는 모두 31명으로 전원 가표를 했고 부표는 한 표도 없었다. 6월 9일, 김관호 목사 위임식을 거행했다.
     이 날 식순
     사회: 김성수 목사(노회 위임국장)
     설교: 이의호 목사(성동시찰장)
     권면: 이응화 목사(장로회신학교)
     기도: 이원태 목사(봉원교회)
     성경봉독: 안창의 목사(군목)
     인사: 김장기 장로

  이 날 떡 잔치를 제직회에서 베풀었다. 떡쌀 낸 이들은 김선희 염종귀 강용렬 신선옥 김동희 조영희 박금구 집사 등이었고, 내게 양복 한 벌을 한 이들은 강용렬 여종귀 신 선옥 이수형 문공신 김양자 김동희 이대환 박금구 집사 등이었다. 그리고 김장기 장로 김선희 집사 두 분이 금반지를, 김동희집사가 티셔츠를, 표재환 장로가 신앙고백서 책 한권을 선물하였다.

(4)신축교회당에서 첫 성례식  
1968년 4월 14일 부활절 주일이다. 새 교회당에서 첫 성례식을 거행하였다. 이 날 학습 세례식도 거행했는데 학습 받은 이는 정혜숙 홍문수 이정자 최병현, 세례 받은 이는 정현옥 이진자 였다.

  (5)첫 여름성경학교
  1968년 7월 29일-8월 4일까지, 첫 여름성경학교가 열렸다. 학생 130명이었다. 수고한 교사는 정인생 한윤수 최병권 이수형 장영희 이정자 임영순 홍미화 이대환 이진자 이복희 이원현 정순분 김영희 정태임 이다. 끝마치고 신촌 봉원교회 현정일 여선생이 2천 원을 주어서 덕소로하루 친교 야유회를 다녀왔다.

(6)건물 추가 공사
1968년 7월 교회당 안에 벽을 발랐고, 10월 초에 교회의 담을 쌓았다. 그리고 10월 중순에 교회당 천정을 했다.

  (7)중직 선거
  1971년 12월, 서울노회에 세 장로 1인 선거청원 허락을 받고 장로선거를 행하였다. 김동희 집사가 전 교우의 전원 찬성표를 얻어 단번에 장로로 피택되었다. 이날 동시에 권사의 선거도 행하였다. 전원의 찬성 거수로 박순화 강용렬 박복실 세 사람이 권사로 피선되었다.

(8)귀한 일군들이 연이은 소천
1972년 3월 3일, 김장기 장로 부인인 김선희 집사가 돌연 세상을 떠났다. 1935년 5월 10일 세상에 왔다가 37년을 살고 갔다. 급성폐렴이라는 진단이었다, 그 가난 중에도 교회봉사며, 교회의무에는 충성을 다하였다. 더욱이 김 집사처럼 목사를 아껴주고 버스비라도 언제나 내어 주고 자기의 가난을 감추면서 최선을 다해 준 사람이 또 있었던가? 언제나 평화로운 얼굴은 온 교회의 사랑과 존경과 우애의 대상이 되었었다. 돌연한 비보(悲報)에 온 교회는 놀람과 비통에 잠겼다. 또한 더욱 가슴 아픈 일은, 홍익교회 초창기부터 충성을 다하던 박순화 전도사가 1972년 5월 4일에 소천했다.
1919년 2월 17일 세상에 왔다가 53세 나이에 주의 품에 안긴 것이다. 독신 30년, 남편을 일찍 여의고 대구고등성경학교를 고학으로 졸업, 그 후 서울 흑석동과 신촌 봉촌동, 그리고 여기 홍익교회에서 봉사하다가 소천한 것이다. 서울노회 전도사 고시에 합격, 그리고 홍익교회의 권사 피택, 다시 김관호 목사의 소원을 이루어  주기 위하여 「소리」잡지를 내도록 주선해 주고 그는 말년에 자기 집을 교회당 옆에 마련하였다가 그 집 전체(44평 대지에 20평 건평)를 교회에 드리고 숨진 것이다.
  두 분은 금촌 기독교 묘지에 묻히셨다.

    

(9)시련기에 빠진 교회
교회당을 신축하고 나름대로 성장하고 있던 교회가 1972년도에 들어서부터 이상하게 시험의 기운으로 가득차고 있었다. 앞서 언급한 대로 두 귀한 일군들이 먼저 세상을 떠났을 뿐 아니라, 불구인 동생과 함께 부산에서 올라온 박성자 자매가 교회의 방에서 임시 유숙하면서 여러 가지 시험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교회 관계된 분들이 불구 소녀를 치료해 주겠다는 무분별한 약속들이 뜻대로 되지 않음으로 마치 교회가 거짓말을 한 것처럼 되어 버림으로 그 짐이 김관호 목사에게 지워지게 된 것이다.
이 사이 마귀가 장난함으로 그 파문이 김 목사의 가정에도 미쳤고 「소리」지에도 미쳤      고 김 목사는 이래저래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다. 김 목사는 졸도하여 입원함으로 돈 10만      원이 자부의 빚으로 달아났을 정도였다. 박 양도 내친걸음으로 막 나갔고 김 목사는 아내와 별거하기도 하고, 「소리」지는 폐간되었다. 1973년은 악몽 같은 한 해였다.

(10)다시 일어서는 교회
1975년에 가서야 아픈 상처도 점차 가시었다. 제직회에서는 의자를 새로 해놓기로 하고 2인에 한 개 이상씩 하기로 하고 교회 경상비와 합하여 20개를 해 놓았다. 전날의 의자는 널빤지 의자로 너무나 불편하고 거칠어서 공회당 같았는데. 20개의 의자를 들여 놓고 나니 이제야 교회당다운 감이 났다.
그리고 그 동안 사택 뒷방에 세 들었던 불신자들을 내 보내고 담임 목사 가정이 이사를 왔다. 외인출입이 번거롭던 일이 이제야 교회당 뜰 안 같았고 점차 교회 일이 궤도상에 오르는 것 같았다. 첫 성경통신과 졸업식을 거행했다. 졸업자 명단은 이순렬 윤순자 권옥례 가남현 한윤수 이경란 김희자 7인이었다.

(11)십일조 교인 증가
교회의 역사가 깊어가니 사막에도 꽃이 피는가? 십일조하는 교인들이 생겼다. 장로나 권사, 집사가 아니라, 무명 평신도들이요, 그것도 하루하루 일당을 받는 고달픈 공인(工人)들의 손에 의해서이다. 윤순자 장용구 김희자 이진주 민관식 김신길 이수형 이명숙 이봉임 김인택이 그 명단이다. 액수라야 210원에서 3,600원 사이다.

(12)발전하는 교회학교
1973년 김인택 전도사가 부임한 후 유년주일학교운동이 활발해졌다. 중고등부도 점차 빛을 받기 시작하고 성가대도 지휘함으로 활기를 띄게 되었다. 김 전도사의 불철주야의 노력으로 감사절 예배, 성탄절 예배가 기쁨이 넘쳤다. 성가대 학생 성가, 유년주일학교생의 성가 등으로 시간마다 기쁨의 예배 진행. 교회 제직회에서는 떡잔치 마련, 성탄절 헌금 52,690원으로 예년에 없던 액수였다.  

(13)「소리」지(誌)에 대한 이야기
  김 목사가 기독공보사 편집국장을 그만둔 후, 박 전도사는 김 목사의 문서전도의 뜻을 살     리려 박찬일 선생 댁을 방문, 그 부인 한종학 집사에게 이 뜻을 말했다. 마침 박찬일 선생이 그 간의 직장에서 11조 몫으로 저축해 두었던 100만원이 있어서 그 금액을 문서전도비로 내놓기로 작정, 이를 회사에 빚으로 주어 월 3만원씩의 이자를 받기로 했다. 이 3만원으로 월간 전도지「소리」지(誌)를 출간했다. 발행이 진행됨에 따라 전국교회의 지지와 환영을 받게 되어 정식 문공부에 등록을 하고 정기적으로 간행케 되었다.
  발행인: 박 전도사
  편집인: 김관호 목사
  후원회장: 김성수 목사,
  회원: 최종해 임택진 오병수 박치순 이동섭 최원행 안관호 김장기

  처음에는 신임하던 실업가들을 손수 찾았는데 겨우 2만원, 5만원이 최고이고 외상이어      서 실망하고 손을 떼고 말았다. 홍익교회의 많은 기도와 교인들의 수천 원씩의 찬조금이 있었으나 이것으로도 충당이 못 되었다. 한 집사가 따로 월 4만 원씩 얻어서 보내와 이것으로 발행, 실비는 되었다. 하지만, 편집 잡비 월 1만 원은 부족하고 더욱이 집필자들에게 계속 무료로 봉사요 청하기도 점점 어려워지는 형편이었다.
  이러는 중에 박 전도사의 와병(臥病), 끝내 세상을 떠나고, 정기덕목사가 무진 노력으로      수개월 발행하면서 근근 유지는 할 수 있었으나 편집자인 김 목사가 박성자 자매의 파문      에 휘말리어 발행할 기력을 전연 상실해 버렸다. 주변의 여러 사람들이 자신 있게 전망하고 나섰으나 현실은 달라,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또한 한 집사가 혼자서 힘겨워 하고 김 목사도 의욕을 잃고 나니 「소리」지(誌)는 4년 만에 끝을 맺고 말았다.

  (14)부흥의 기운이 일기 시작하는 교회
  김관호 목사 가정이 사택으로 이사온 후부터 민병희 사모를 중심으로 새벽기도를 시작한 뒤에 점점 기도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학생들도 등교 길, 혹은 하교 길에 들려서 기도하기 시작함으로 부흥의 기운이 싹트기 시작했다. 1975년 여름성경학교, 7월 28일부터 8월 1일까지 5일간 김인택 지도교사의 치밀한 계획 하에 진행하다. 수고한 교사는: 이형규 가남현 권옥례 남명옥 이순렬 이명숙 양희숙 변영희 이재호 윤영태 등이었다.
처음 등록금을 받고 입학원서와 중간 입학 불허 등 여태까지의 양적 위주의 운영에서 질적 위주로 방향을 전환했다. 온 학생이 교본을 샀고 공부다운 공부가 진행되었다. 중간의 이탈자 하나 없고 재미중에 끝마쳤다.
1975년 여름학생수련회, 8월 4일-8일까지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 수동감리교회를 장소로 해서 수련회가 개최되었다. 가곡교회 김태복 목사의 주선으로 수양처로는 더 이상 없는 장소를 얻게 된 것이다. 김인택 지도교사의 치밀한 수양회 프로그램에 의하여 일사불란하게 성공을 거둔 수련회였다. 강사로는 정기덕 목사, 김태복 목사가 봉사키로 나서주었다. 새벽기도회, 새벽운동으로부터 시작하여 저녁 자정이 되기까지 연속적인 과목으로 영육이 아울러 고된 수련을 행한 것이다. 그러한 교회학교와 중고등부의 뜨거운 분위기가 교회를 뜨겁게 만들기 시작했다.  

(15)65세 나이로 은퇴 결심한 김관호 목사  
김관호 목사는 65세 나이로 은퇴하기로 결심하고 1975년 7월 13일, 당회에서 김태복 목사를 본교회의 부목사로 초빙키로 결정하였다. 즉일로 초빙서 발송하였다. 제직회에도 당회의 결정을 통고, 이의 없이 받아 들여졌다. 김 목사는 1975년 말까지 일하기로 기도하며 혼자서 이 일을 결정하였고, 후임으로 평소에 늘 생각해 오던 김태복 목사를 두 달 전 만나서 내락(內諾)을 받았던 것이다. 그 목사가 아니고는 도저히 여기 약하고 서글픈 교회를 이끌어갈 수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김관호 목사가 당회의 결의를 마치고 쓴 글)
새싹들이 많이 돋아났다. 난 이젠 이들 앞에 설 아무 것도 없다. 주께서도 그의 가진 바를 통해서 역사하심을 나는 믿는다. 이제는 젊은이들을 이끌 젊은 일꾼이 이 교회에 필요한 것이다. 강단에 설 때마다 자꾸만 울려나는 내 마음속의 소리다. 설교도 계속 인생무상이며 죽음의 대비에 대한 것이 나와서, 힘차게 살아가야 할 이들 앞에 간간 괴로움을 느낀다. 하지만, 나이 탓이라 어쩔 도리가 없다.
  나는 평소부터 목사의 정년(停年)을 65세로 주장해 왔다. 예외도 물론 있겠으나 대체로      보아 65세 이후의 목회란 교회의 마이너스가 더 많은 것이다. 여기 찾아봐야 할 외로운 이들이 많은데 이제 난 힘이 나질 않는다.
  교회에서도 나의 뜻 이해해 주고 내 생각 받아주며 더욱이 날 신임하고 내가 추천하는 후임 교역자를 받아주니 기쁘다. 주께 감사드릴 뿐이다. 젊은 일꾼 받은 홍익교회는 복 있는 교회다. 모르는 교회, 생각이란 걸 모르는 마이동풍들, 이 가난, 저 고달픔들. 여기 와서 십자가 저야 할 그의 노고를 생각할 때,  지금 나의 숨김없는 마음 한 구석에는 김태복 목사가 측은한 정이 든다. 그러나 그만치 주의 위로가 계실 줄 믿는다. 온 교회가 사랑과 기도로 크게 도웁고 귀가 열려 복음이 받아들여지기만 간절히 기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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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45주년사 원고(1993-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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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45주년사 원고(1983년-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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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45주년사 원고(1976년-198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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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45주년사 원고(1968년-197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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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45주년사 원고(1960-196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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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기애환사(198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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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기애환사(건축준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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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기애환사(197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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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기애환사 수록작업을 마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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