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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교회초기애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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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양실 (2005-09-01 16:37:37, Hit : 3151, Vote : 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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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45주년사 원고(1960-1967년)
홍익교회 45년사

1. 개척교회기(1960년-1967년)  
(1)교회가 개척하게 된 동기와 설립과정
1960년 12월 11일: 당시 세칭 N.A.E 파동으로 교회가 나뉘어 지는 중에 마장동교회(지금의 성석교회)도 이에 휩쓸려 교인 일부가 따로 났다. 교회의 평화를 위하여 뜻을 같이 하는 이들, 즉 이종정, 심재원, 박문실 주종신, 전복안 제씨 와 그의 가족이 따로 모여 예배를 드리기로 한 것이 본교회의 시작이다.
1960년 12월 8일: 첫 예배를 이종정 장로 가정에서 드렸다. 이 날 예배는 김관호 목사가 인도하였다. 김 목사는 총회 교육부 간사로 있었으며, 신촌의 개척교회당에 설립하여 시무하고 있었는데 3년 만에 교회당 부지 100평을 마련한 때였다. 개척교회에는 이원태 전 도사가 있었다. 개척교회당의 건축은 이 전도사에게 맡기고 김관호목사와 박순화 전도사는 새로 시작되는 교회에서 봉사키로 한 것이다. 박 전도사는 김목사의 제의를 받아 들여 이를 결정한 것이다. 첫 예배는 이종정 장로 가정을 중심으로 모였다.
1960년 12월 25일; 성탄절이자 주일. 예배 장소를 임시로 석씨 피복공장 작업실에서 가졌다. 이것이 첫 공식예배였다. 이날 모인 사람들은 이종정 장로, 그의 부인 박옥실 집사, 심재원 장로, 박문실 권사, 그의 조카 박림호 집사, 주종신 집사, 그의 아들 오영칠 군, 전복안 집사, 기타 어린이까지 23명이었다.

(2)교회 조직 구성
1961년 1월 1일: 예배 후 첫 제직회가 구성되었다. 제직회원은 목사 김관호, 전도사 박순화, 장로 이종정 심재원, 권사 박문실, 집사 주종신 박옥실 전복안 나인창 박림호이었다. 제직회 서기는 주종신, 회계 나인찬 이었고 유년부장 이대환, 성가대 지휘 오영칠 반주자 주정옥이었다. 교회 소속은 대한예수교 장로회 경기노회로부터 마장동 교회의 전통을 잇는 교회로 승인을 받고 완전한 조직교회로 노회에 등록됨으로 정식 교회가 된 것이다.    

  (3)교회당 이전
  1961년 1월 15일에 교회당을 석씨 공장에서 하왕십리로 이전하였다. 대로변의 상점 2층 집이었다. 매우 허술한 집이어서 나무 층계를 오를 때 삐걱 소리가 났고, 매우 약하여 불안한 층계였다. 그나마도 이층이 기억자로 되어서 중간 모서리에 강대상을 놓음으로 자연 남녀 석으로 나뉘어졌다. 이층 층계 우편은 세 들어 있는 미장원, 좌편은 교회당이었다. 바로 앞이 시장이어서 떠드는 소리와, 라디오상의 확성기에서 나오는 유행가 소리 때문에 도무지 예배 분위기가 안 되는 집이었다.
  하지만 석씨공장의 기계소리보다는 나았다. 이종정 장로가 어디서인가 낡은 풍금 한 대와 강대상 하나를 얻어다 놓았다. 성가대용으로 이대한 청년이 송판조각을 어디서 몇 개 얻어다가 걸침 의자를 만들었다.

  (4)틀을 갖추어가는 교회  
  ①첫 성례식
1961년 4월 부화절에 첫 성례식이 있었다.
첫 세례자는 다음과 같다.
학습: 고경숙 조천순 김병덕 최해옥 임상준(현 시무장로)
세례: 염종귀(임상준 장로 모친) 김양자(현 권사)

②어머니 주일
1961년 5월 14일: 어머니 주일 축하예배를 드렸다. 설교/김관호목사, 독창/박경자, 사중창/송여자 이류자 박림호 이병선, 바이올린 독주/김정수, 독창/오관훈(어머님 기도), 찬양/성가대(영생포구, 신의 영광) 오전예배 후 떡 잔치를 했다.

③사례비 받지 않으신 김관호 목사
교회 형편이 어려운 관계 때문이기도 하지만 김관호목사는 자신은 총회 교육부에서 사역하기 때문에 당분간 무급으로 봉사하기로 했고 사택은 상도동 자택이 있었다. 대신 박순화 전도사는 서병찬 장로가 매월 5천 원씩 2년 간 계속 돕는 것으로 매월 5천원의 사례비를 드렸다. 그의 숙소는 신촌 봉원동에 있었다.

  ④학생 지도자 초빙, 첫 야외예배
  1962년 4월 첫 주일에 김흥택 집사(신촌봉원교회)를 학생 지도자로 초청하였다. 그리고 1962년 5월에 천호동 광나루 산(아차산)으로 첫 야외예배를 갔다. 학생까지 50여명이 참여하였으며. 예배 후 한강의 흐름을 바라보면서 떡 잔치를 하였다.

  (5)두번 째 교회당 이전
  1962년 6월 2일에 교회당을 하왕십리에서 홍익동으로 옮겼다. 당시 이종정장로가 세계기독교봉사회(C.W.S)의 총무로 재직했는데, 봉사회에서 구제사업의 일환으로 헌 양말실 푸는 공장을 마련하고 여공을 모집하여 일을 시작했는데, 그 봉사회에서 얻은 공장 셋방에 연접한 방 한 칸을 세내어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교회당은 좀 나았으나 환경이 나쁜 것은 여전했다. 교회당에 들어오는 공장 복도가 너무 어두웠다.
  방 절반은 칸을 막아 한 편에 학원이 세 들어 있고 아래층에 있는 무허가 약방에서 나는 지독한 냄새 때문에 여름에는 비지땀을 흘려야 했다. 더욱이 근처에는 예전부터 있는 유명한 무당집들이 있어서 날마다 굿하는 푸닥거리소리가 요란하였다.

(6)교회명 홍익교회로 개칭
교회를 옮기고 교회이름을 바꾼 것은 이종정 장로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교회 앞은 여전히 행길이라, 엿장수, 넝마주이들의 가윗소리, 확성기 소리가 시끄러워 예배드리기가 어려웠다. 여기에다가 깡패들이 들끓어 밤에는 여학생들이 오가는 길에 돌멩이가 날아들고 주정뱅이들까지 교회에 들어와 난로를 걷어차기도 하였다.

(7)교회당 내부 시설
새 셋방교회당이 좀 넓어 교회당 뒤에 베니어판으로 막아 두 방을 만들고 한 방은 박 전도사가 기거하게 하고 다른 방은 당시 집이 없는 김광옥 장로(천안 거주)가 기거토록 하였다. 봉사회의 총무가 나오는 교회라 하여 실직자들이 모여 들어 전직 장로도 세 명이나 출석하였다. 김봉원 장로, 김경옥 장로, 그리고 김광옥 장로 등이다. 이들을 협동 장로로 대우하기로 하였다. 실 푸는 여공들도 예배에 참석하여 어느 주일에는 무려 200여명까지 모였다. 모두들 이종정 장로가 교회당을 세울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후에 홍익교회 원로 장로가 된 김장기 집사(영락교회)도 그 당시 교회 등록하였다.

(8)초기성장과 격동기
  ①첫 부흥회
  1964년 겨울, 첫 부흥회를 열었다. 강사는 침례교의 오관석목사였다. 오 목사의 첫 부흥회 기간이라, 그 열의와 영력은 대단했다.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200명 앉을 자리가 500명이나 겹쳐 앉았다. 긴 복도에까지, 그리고 유리창에까지, 행 길가에까지 사람들이 넘쳐났다. 그 흔한 확성기도 교회에는 없었다. 아래층 약 공장에서는 마루가 내려앉는다고 모두 밖으로 뛰어나와 소란을 피우면서 교회에 항의를 했다.
  강사도, 교회당의 마루가 내려앉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렸다. 본 교회에 없던 감사헌금이 타 교회 교인들로부터 연야 들어왔다. 교회 빚도 갚고 교회건축을 위한 기금으로도 여간 적립됐다고 회계 박옥실 집사가 보고했다.
  은혜가 넘치는 곳에 시험도 있었다. 심재원 장로가 불참하다가 마지막 밤에 부부가 참석했는데 부인 홍묘희 집사가 아래층 시멘트 바닥 위에 떨어지고 말았다. 연로하여 몸을 잘 못 쓰는 것을 부축하여 강대상 앞자리에 앉게 하고 온 교회가 철야로 그를 위하여 기도 드렸더니, 은혜로 차차 회복하여 성한 몸이 되었다. 기적이라고 다들 생각하였다.

②신임 교육전도사 부임
김흥택 집사 후임으로 신학생 김순권 전도사가 부임했고 학생 지도자를 겸하게 되었다. 그의 유능한 지도로 학생회와 주일학교, 성가대도 활기를 띠게 되었다. 하지만, 김순권 전도사는 군목 입대로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후임으로 신학생 안창의전도사가 부임하였다. 그의 유능과 열성으로, 토론회 개최, 회지 발간, 음악예배, 체육부서의 등산대회 등, 청년회 운동에 큰 역사가 있었다. 이 때 김 목사도 청년들을 따라 처음으로 백운대 등반을 하였다. 같이 동행했던 박순화 전도사, 신선옥 집사도 모두 건각(健脚)이었다.

  ③성가대 지휘자와 반주자
  교회를 시작한 뒤부터 이날까지 역대 성가대 지휘자와 반주자는 다음과 같다.  
1대: 오영필, 2대:김봉원, 3대:김순권, 4대:김안기, 5대:차병균, 6대:정인생. 풍금 반주자로는 주정옥, 김양자,

  ④첫 중직선거
  1965년 7월 4일: 노회의 허락을 얻어 장로 1인 선거를 하였다. 본 교회에서 첫 장로로 김장기 집사가 피택되었다. 이와 아울러 당회에서 홍묘희 집사를 권사로 임명하였다. 김장기 장로 장립식 순서와 홍묘희 권사 취임식 순서는 다음과 같다. 사회/김관호 목사, 설교/계일승 목사(총회신학교 교장), 권면/ 최중해 목사(한양교회), 권면/이응화 목사(장로회신학교), 축사/김성덕 여사(숭의여고 이사장), 기도/서병찬 장로(영락교회), 축사/한재달 장로(상도동교회), 축사/안관호 장로(삼각교회), 안수기도/김성수 목사(도원동교회, 노회 서기)

⑤기독교방송 예배실황  
1965년 9월 11일: 어머니 주일. 기독교방송국에서 홍익교회 예배실황을 전국에 중계방송하였다. 이날 설교제목 "사랑의 원천(源泉)"

⑥신현균 목사 부흥회
1965년 여름부흥회: 오관석 목사 부흥회 이후, 제2회로 신현균 목사를 강사로 초청하여 여름부흥회를 열었다. 신 목사의 첫 열심 시절이라,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더욱이 영일만에서 석유가 난다는 계시를 받았다는 첫 발표를 우리 교회에서 했다. 낮 시간에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큰 부흥이 일었다. 교회당 뒷방 박 전도사의 숙소를 강사의 숙소로 하고 식사는 교인들이 돌려가면서 담당했다.
    
⑦교회당 건축준비
1966년 가을에 건축을 위하여 헌금을 시작한 것이다. 한 달에 한 번씩 건축을 위한 헌신예배를 드리기로 작정했다. 합계가 99,000원이었다.

⑧성장한 교회의 모습
아래 1966년도의 직원 현황을 보면 교회가 상당히 성장했고 나름대로 조직교회로서의 틀을 거의 갖춘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아닐 수 없다.
  (1966년도 직원 현황)
목사: 김관호  전도사: 박순화  
장로: 심재원  김장기  이종정
협동장로: 김광옥 김봉원 김경옥
권사: 박문실  명예권사: 김경옥
남집사: 송준섭 김동희 홍종렬 김안기
여집사: 염종귀 김선희 강용렬 전복안 신선옥 김탄실 심은실 장진분 박금구 장명주 박옥실
학생지도: 안창의
주일학교 반사: 안창의 이대환 홍종렬 정인생 이종식 김안기 강봉원 이인세 김흥순 김정섭                 김정현 장영희 정경성 심인자 김송월 김미라
성가대장: 김동희, 지휘자: 김안기, 반주: 김양자
대원: 김정섭 장영희 이선자 진봉석 정경선 이정환 최영자 신선옥 김흥순 김미라 심인자
      민병희 김정현 홍종렬 송덕남 이대환 정인생 임상준 이종식 강봉원 안창의    
  여전도회 회장: 박옥실 서기: 강용렬 회계: 김탄실

  (9)교회이전과 교회건축(1차)
  ①이전부지 계약
  1967년 5월 3일, 교회당의 전세금을 대폭 올리겠다는 집주인의 통고에 제직회에서는 교회당 건축을 결의하고 대지 물색에 나섰다. 교회당 근처는 평당 2만 원 이상이나 하였고, 당시 교회가 보유한 현금은, 그간의 건축헌금 등으로 저축한 돈이 모두 합하여 전세금 50만원뿐이었다.
  그래서 값싼 땅을 구하기 위하여 동쪽으로 복덕방을 차례로 찾아가다가 김 목사와 이종정, 김장기 장로, 송준섭 집사 등, 네 사람이 나중에 도달한 곳이 현 교회당 장소인 한양대학의 땅인 공지와 한영중고교(현재의 세림아파트 자리)의 뒷산 빈 터 자 리에 있는 사유지 200평을 발견하였다. 평당 6,500원이었다.
그러나 도로도 없고 무인공산(無人空山)이라, 교회당 부지로는 적합한 장소가 아니었으나, 교회 재정 형편을 고려하여 이곳 땅 60평을 사기로 결정하였다. 제직회에 보고한 다음 계약금은 빚을 얻어내기로 하고, 계약 일체를 회계집사인 박옥실 집사에게 일임했다.
②임시예배 처소
1967년 8월 1일, 셋방주인으로부터 집을 비워 달라는 말을 들었다. 교회에 광고해야겠으니 주일까지 2일간 유예해 달라고 했다. 하지만 집주인은 내일로 당장에 집을 비우라는 것이다. 건물을 사는 이가 나타났는데 교회당을 비워줘야만 계약하겠다고 한다는 것이었다. 다행히 교회 부근에 공장을 운영하던 김동희 집사댁에 교회 집기들을 옮겨 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주일부터 김동희 집사의 마당에 모여 마루 위에 강대상을 놓고 마당에 의자를 놓고 예배를 드렸다. 교인들은 물어물어 골목길을 찾아 새장소로 모여왔다. 전세금 50만원으로 교회 땅값(60평)의 빚을 다 갚았다.

③신축기공예배
1967년 9월 22일, 파란곡절을 거듭 겪으면서 드디어 교회당 신축기공예배를 드렸다. 이 날 김 목사의 설교는 “여기 우리의 받은 포도원이 있다”로 성경은 느2:17-20, 마7:24-27였다. 무인공산(無人空山), 바람은 찼다. 인수봉 백운대가 모두의 눈에 들어왔다. 그 날 건축허가가 나왔다, 첫 기공삽을 들었다. 차례차례로 모두 삽을 들었다.
이날 기공 예배에 참석하여 삽을 든 이는 다음과 같다.
김관호 김장기 김동희 염종귀 김선희 조영희 오갑현 오소화 신선옥 이대환 정인생 문공      신 장진분 박순화 등 14명이었다. 단 한 사람도 셋방 아닌 사람이 없다. '세상에 이런 모임이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저 기뻤다.  
  무인공산에 우리들의 교회당이 날마다 조금씩 건축이 되어갔다. 블록 담이 쌓아 올라갔다. 흩어진 목재며, 모래를 바라보면서 모두는 어린애들처럼 기뻐하였다. 수일 후 교회당 뒷벽이 높이 올라갔다. 그런데 돌풍에 그 벽이 무너져 내렸다. 목수와 블록 공사 맡은 이가 서로 다른 이여서 발판을 미리 치운 관계로 시월 바람에 의지 없는 벽이 무너진 것이다.
다시 쌓기로 하였다. 기초를 더 깊이 파고 블록 기둥을 박으면서 속에 '앙꼬'를 넣어가며 뒷벽을 다시 쌓아 올렸다. 쌓아 놓고 보니 오히려 무너졌던 것이 잘된 일이었다. 만약 먼저 쌓은 벽에 그 육중한 목재를 올려놓았다면 더 큰 위험을 만날 뻔했던 것이다. 다시 한 번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이로 인하여 피나는 돈 2만원이 더 들어갔으나 우리들은 잘된 일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④신축교회당에서 첫 예배
1967년 10월 8일: 신축교회당에서 첫 예배를 드렸다. 신축교회당이라지만, 아직 천정도 없는 단지 사면의 벽만 쌓아 올린 집이었다. 김동희 집사 댁에서 모이던 것을 오늘부터는 여기서 모이기로 하였다. 모두들 새 옷 차려 입고 모였다. 푸른 하늘 밑에, 그래도 벽이 둘린 곳에서 우리들의 마음도 하늘처럼 맑아져서 감사의 예배를 드렸다.
   이날 모인 사람들이다.
  박순화 염종귀 신선옥 정신애 장진분 김선희 조영희 이수형 강용렬 송준섭 박금구 김동희 김장기 홍묘희 심재원 정명옥 이복희 남명옥 정현옥 최영자 이보명 이정희 장영희 김양자 장용성 오갑현 오소화 이재인 임상준 김정현 이대환 이인세 정문실 강병룡 심정근 이외 장로회보 기자 등, 동네 어른까지 합 40명이었다.
첫 예배 후에 임시제직회로 모였다. 블록 벽돌을 자리로 했지만 기쁨이 넘친 제직회였      다. 여전도회에서는 교회당 정문을 해놓기로 하였으며, 청년회에서는 교회당의 유리 창문을 해놓기로 하고, 전기가설 등, 다 결정되었다.
그런데 제직회 도중, 박옥실 집사가 와서 교회의 강대상이며, 의자와 풍금 등, 이 장로가 얻   어 왔던 일체를 도로 찾겠다는 말을 하여 그의 요구대로 셋방 교회서 쓰던 것을 다 돌려 주기로 하였다. 다음 주일, 이 장로 내외가 제직회에 와서 그간 셋방교회에서 당신이 낸 헌금 20만원을 반환해 달라는 요구를 했다. 헌금 액수가 그 만큼은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하나님께 드린 헌금을 누가 반환할 것인가? 마침 참석 중이시던 심 장로가 그 요구의 부당성을 강력히 설득하여 이 문제는 더 거론되지 않았다.
1967년 10월 13일, 마침내 지붕을 덮었다. 가랑비가 내렸다. 드디어 지붕 덮은 교회당 안에 들어섰다. 참석했던 이들은 통금 전까지 교회당을 떠날 줄을 몰랐다. 10월 15일, 지붕 덮은 교회당에서 처음 예배를 드렸다. 유년 주일학교도 시작했다. 장년들은 또 한번 명절 기분을 내었다. 온 교우가 모두 교회당 내외의 미화 작업에 나섰다. 미화작업이라야 기구도 하나 없고 흩어진 블록을 모아 놓는 일과 땅을 고르는 일이었다. 강대는 블록을 쌓아 놓고 예배상을 만들었다.
벽 쌓고 지붕 덮고 정문을 만들고 유리창을 단 것으로 일단 건축공사는 끝이 났다. 김장기 장로가 그간의 건축비에 대한 보고를 하였다.
  수입: 교회서 차용한 금액(1차) 156,220원
               차용한 금액(2차) 150,000원
               김장기 장로가 외부에서 헌금 받은 금액 25,000원
               김장기 장로가 외상으로 사온 자재대금  67,270원
  지출: 393,490원(건평 30평)
  박순화 전도사가 구입한 교회 옆 대지에 20평의 가옥을 짓고 1967년 10월 31일에 이사    를 왔다. 이로 인하여 그의 사택은 교회당 교육관 겸, 제직회나 사택 등으로 사용됨으로 교회에 큰 유익을 주었다. 교회당 건축 때문에 생긴 부채 15만원을 갚기 위하여 김동희 집사의 제의로 계를 만들었다. 한 몫 분이 매달 9천 원씩이었고 교회도 한 몫을 분담하기로 했다. 그러므로 계 든 교인들은 매달 9천 원씩 교회에 헌금한 셈이 되었다. 후에 이 계는 원만히 끝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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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45주년사 원고(1993-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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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45주년사 원고(1983년-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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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45주년사 원고(1976년-198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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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기애환사(197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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